나는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과정을 모두 외국에서 받았다. 한국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1학년 1학기까지 정상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어떻게 하면 명문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까만을 생각하던 평범한 학생이었던 내가 외국생활을 하게 된 것은, 당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께서 일본 오오사카 영사관 파견 근무 발령을 받고 일본으로 가시게 되면서이다. 요즘이야 외국에 한 번 나가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아버지의 해외 근무는 우리집 식구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든 엄청난 사건이었다.
가장 시급히 결정해야 할 사항은 누가 아버지와 같이 일본에 갈 것인가였다.아버지의 잦은 지방 근무로 두 집 살림에 이력이 난 어머니는 처음부터 아버지와 같이 일본에 가실 것을 확실히 하셨다. 또 이미 대학생이 되어 버려 전학이라는 말이 적용되지 않았던 형과 누나는 한국에 남는 것이 당연했다. 아직 초등학교 2학년생에 불과했던 내 여동생은 부모와 떨어지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으므로 부모님과 같이 일본으로 가야 했다. 문제는 나였다. 당시 고등하교 1학년생이었던 나에 대한 결정은 쉽게 내릴 수가 없었다. 형, 누나와 같이 한국에 남아 열심히 대학 입시를 위한 공부를 할 수도 있었으나, 대입 수험생을 한국에 혼자 남겨두고 떠나기엔 어머니의 마음이 편치않았다. 그렇다고 고등학교 1학년 때 덜렁 외국으로 가기에는 대학 진학을 포함해 앞날에 대한 불확실성이 너무 컸다. 수차례의 가족회의 끝에 내린 결론은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큰 고민에 빠졌다. 입시지옥에서 벗어나 외국에 가서 공부한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2년 남짓 일본에서 공부한다고 해서 일본어를 제대로 배울 수 있을지, 한국에 돌아와서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지 불안이 앞섰다. 여름 내내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나는 일본으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학교 선생님들과 상의해 본 결과, 공무원 신분의 아버지를 따라 외국에 갈 경우 돌아와서 대학 입시에 특혜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 나의 불안을 해소시켜 주었다. 더구나 일본 고등학교가 아니라 일본에 있는 외국인 학교에 진학할 경우 영어까지 배울 수 있다는 말은 정말 매력적으로 들렸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렇게 나의 일본행은 결정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때 일본 고베에 있는 외국인 학교 10학년에 편입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외국인학교에서의 첫 1년이 내가 보낸 총 16년간의 외국생활 중 가장 힘든 기간이 아니었나 싶다. 요즘 중고등학생들은 학교에서 영어회화 교육을 제대로 받아서인지 기본적인 회화는 곧잘 한다. 그러나 교과서와 참고서에 나오는 문장과 문법을 몽땅 외어버리는 식의 영어교욱을 받았던 내가 낯선 외국인 학교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란 한마디도 없었다. 학교 밖에서 일본말을 알아듣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그 어려운 난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잘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이다. 물론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힘든 것을 힘들게 느낄 만한 지각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철부지였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나 싶다아마 지금 다시 하라면 도저히 못할 것이다.
그러는 사이 귀도 트이기 시작했다. 한 달 두 달 지나면서 한두 마디씩 알아듣게 되었고 언제부터인가 학교 생활이 조금씩 재미있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또 학교 생활의 스트레스를 푸는 주된 방법이었던 TV 시청 덕택에 일본말에도 조금씩 귀가 트였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한국에서 문과 취향을 가졌던 내가 수학, 과학 등 이과 쪽 과목에 더 많은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이다. 영어야 더듬더듬이었지만 수식적, 논리적 전개에는 크게 뒤질 게 없었다. 비록 입시위주의 교육이었지만 한국에서 배웠던 수학,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수학, 과학시험은 항상 반에서 제일 좋은 점수를 받았다. 자연히 그 쪽 분야에 대한 관심과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졸업을 앞두고 욕심이 생겼다. 대학진학은 한국으로 돌아가서 한다는당초 계획과는 달리 미국 대학 진학을 준비한 것이다. 거기에는 주변 친구들이 거의 다 미국 대학 준비를 한 이유가 컸다. 또 미국 유명 대학에 진학하면 외국인일지라도 장학금 혜택이 가능하다는 진학 상당교사의 조언에 힘을 얻었다. 결국 나는 외국인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MIT에 적지 않은 금액의 장학금을받고 진학하게 되었다.
MIT에서의 학부 생활은 그다지 힘든 것이 없었다. 3년간의 외국인 학교 생활을통해 영어는 곧잘 할 수 있게 되었고, 특히 정신적으로도 적지 않게 성숙해져 부모님을 떠나 사는 것이 힘들지 않게 느껴졌던 것 같다. 대학생활 중 가장 어려웠던 것은 전공 선택이었다. 미국의 많은 유명 대학들이 그렇듯이 MIT에도 학부 입학 전공이란 없다. 전공은 2학년 때 본인이 원하는 어떠한 전공이라도 선택할 수 있었고 전공 변경도 본인이 원할 때는 언제든지 가능했다. 졸업 전까지 한 전공이 요구하는 필수 과목들을 이수하면 이게 곧 졸업 전공이 되었다.
MIT에 진학하면서 나는 물리학을 전공하리라 생각했다. 일단 고등학교 때 내가 제일 좋아하고 잘했던 과목이었고 세상의 수많은 현상을 몇 개의 기본적인 법칙으로 깨끗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1학년 1학기 때는 물리학 전공을 원하는 학생들을 위해 특별히 개설된 일반 물리학 과목을 선택해서 아주 열심히 그리고 재미있게 공부했다.
하지만 물리학자가 되고 싶었던 나의 희망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당시 같은 한인교회에 다니고 있던 하버드 대학의 물리학 박사님의 조언 때문이었다. 그 분은 칼텍(Caltech)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에서 입자이론 물리로 박사 학위를 딴, 자타가 공인하는 수재 중의 수재였다. 그분 말씀이 물리학이란 학문은 이제 너무 성숙해서 학문적인 연구 대상으로서의 매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연구에 관심이 있다면 신생 학문인 생물학을 공부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언해주셨다.
내가 존경하던 분의 말이었기에 이 말은 나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대학에 진학해서 생물학 과목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물학은 내겐 생소한 분야였다. 어쨌든 나는 생물학이 어떤 학문인지 알기 위해 1학년 2학기 때부터 생물학 실험실에서 일을 해보기로 했다. MIT에서 UROP(Undergraduate Research Opportunity Program)란 아주 독특한 교육프로그램이 있는데, 이 프로그램은 말 그대로 학부 학생들에게 연구가 무엇인지 그 맛을 볼 수 있도록 교수의 실험실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UROP를 통해서 나는 생물과 교수의 실험실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실험실에서는 어떤 특정한 약물이 간에 미치는 작용에 관한 연구를 했던 것 같다. 내가 맡은 일은 쥐의 간에서 추출한 물질의 분석을 위한 기기 운용 및 측정 데이터 분석이었다. 대학교 1학년생이 뭘 안다고 실험실에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겠지만 실험실에 매일 나가 이런 것 저런 것을 보고 배우며 실험실의 분위기를 익힐 때, 그 교육적 효과는 매우 크다. 그때 내가 했던 일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것들은 마치 동물원을 연상시킬 만큼 엄청난 규모의 사육장에서 키워지는 쥐, 토끼 등의 실험용 동물 먹이주기, 그리고 실험에 사용될 쥐의 목을 자르던 일이다.
하지만 6개월의 생물학 실험실 생활 후 나는 분명한 결론에 도달했다. 생물학은 내 적성에는 맞지 않았다. 신생 학문이어서인지 논리적으로 깨끗하게 문제를 풀기보다는 많은 지식과 추론에 바탕을 둔 생물학적 문제 해결방법이, 당시 세상을 무척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나에게는 별로 매력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물리학, 생물학은 아니라고 생각한 나는 공학 쪽으로 눈을 돌렸다. 공학의 많은 분야 중에서도 나는 자연스럽게 EECS(Electrical Engineering and Computer Science)쪽 전공을 택했다. EECS는 당시 MIT에서 가장 잘 나가는 분야여서천여 명 정도 되는 한 학년 학생 중 약 40%가 전공으로 선택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학을 해보겠다고 마음먹은 나로서 EECS선택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EECS전공은 말 그대로 EE와 CS 두 분야로 나누어져 기초 공통과목 네 개를 이수한 후 EE 또는 CS전공으로 세분화되는 교과과정을 가지고 있었다. EECS전공을 선택했을 때 맨 처음 나의 관심사는 CS쪽이었다. 고등학교 때 당시 처음 나왔던 8-bit 컴퓨터(hard-disk, floppy disk driver도 없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초보적인 컴퓨터)로 프로그래밍에 상당한 재미를 느꼈었고 고등학교 졸업 때에는 최우수 프로그래머상을 타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CS분야에 대한 나의 관심은 그리 오래 가지 앟았다. 6.001이라 불리는 Structure and interpretation of computer programs라는 과목을 2학년 1학기 때 수강하면서 나보다 컴퓨터에 대해 수십 배는 더 잘 알고 , 컴퓨터에 대한 정열이 수백 배 이상 커보이는 학생들을 보고는 솔직히 맥이 빠졌다. 내 눈에는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수많은 해커들과 경쟁해서 나는 이길 자신도 없었다.
결국 나는 EE전공으로 대학을 마쳤다. 특히 전자기, 반도체와 같이 물리적 지식과 사고방식을 요구하는 전문 분야 과목을 많이 수강했다. 좋아하는 분야의 공부를 해서였는지 성적도 잘 나왔다. 대학을 마치고 나는 MIT대학원에 진학해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왜 대학원에 진학했느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당시에는 공부 외에 특별히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였다라는 말이 가장 정확한 대답일 것이다. 하지만 대학원생 시절은 나에게 너무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6년 6개월이라는 긴 기간 동안 나는 거의 아무런 제약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하면서 살 수 있었다. 일단, 경제적으로는 학교 등록금 전액과 매달 천 달러 이상의 월급을 연구조교라는 명목으로 받을 수 있어서 혼자 먹고 사는 데는 전혀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나의 연구주제는 반도체 레이저 개발이었는데 반도체 결정 성장, 물성 측정, 소자 설계, 제작, 측정에 이르는 아주 광범위한 분야의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연구결과보다는 연구능력 향상을 통한 인재 양성이라는 점을 더 강조했던 내 지도 교수의 배려 그리고 그러한 자유로움을 지탱할 수 있었던 MIT의 풍성한 연구환경 덕택에 가능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많은 시행착오를 나 홀로 겪는 것보다는 잘 정의된 연구 과제를 좀더 집중적으로 연구했었다면 좀더 효율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당시의 수많은 경험들은 내 평생의 자산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솔직히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때처럼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진학을 앞둔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 사람들에게 내가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하고 싶은 일을 하라. 단, 하려면 아주 잘하라’는 말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일에 대한 사회의 일반적인 평가에 상관없이 보람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나 또한 그렇게 살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다.